“금보다 귀하고 비쌌다”… ‘후추’ 효능과 보관법 그리고 몸에 쌓인다는 오해의 진실

by 김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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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속 검은 황금 후추의 풍미를 200% 올리는 과학적 사용법

후추
접시에 담긴 검은 후추 / 푸드레시피

전 세계 거의 모든 주방에 자리한 후추는 요리의 풍미를 완성하는 조미료다. 하지만 이 작은 검은 알갱이의 맛과 향, 그리고 건강상 이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따로 있다.

많은 사람이 무심코 사용하는 이 향신료는 언제 넣고 어떻게 보관하는지에 따라 그 가치가 크게 달라진다. 후추의 진정한 가치를 끌어내는 과학적인 사용법부터 몸에 해롭다는 속설의 진실, 그리고 금보다 귀했던 역사적 배경까지, 가장 실용적인 정보부터 차례대로 알아본다.

후추 풍미 극대화 보관과 사용법

후추
접시에 뿌리는 후추 / 푸드레시피

후추의 진정한 가치는 코를 자극하는 풍부한 향에 있다. 이 향은 매우 민감하고 휘발성이 강해 열과 공기에 쉽게 손상된다. 따라서 후추 본연의 맛과 향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요리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나 식탁에 올리기 직전에 넣는 것이 좋다. 처음부터 넣고 오래 끓이면 특유의 향이 대부분 사라지고 쓴맛이 남을 수 있다.

둘째, 미리 갈아둔 가루 제품보다는 통후추를 구입해 사용할 때마다 직접 갈아 쓰는 것이 월등히 낫다. 분쇄된 후추는 공기와의 접촉 면적이 넓어져 산패가 빠르고 향 손실이 크기 때문이다. 통후추는 밀폐 용기에 담아 직사광선이 닿지 않는 서늘하고 어두운 곳에 보관하면 6개월 이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후추 섭취와 축적 오해의 진실

후추
숟가락에 담긴 간 후추 / 게티이미지뱅크

후추를 많이 먹으면 몸에 그대로 쌓여 해롭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후추의 매운맛과 향을 내는 핵심 성분인 피페린은 섭취 시 체내에서 축적되지 않는다. 우리 몸의 대사 과정을 거쳐 분해된 후 대부분 소변으로 안전하게 배출된다.

미국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의학도서관(NLM)에 등재된 여러 연구 자료는 피페린이 체내에 쌓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영양소의 흡수를 돕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밝힌다. 대표적으로, 강황의 주성분인 커큐민과 피페린을 함께 섭취하면 커큐민의 체내 흡수율 및 생체이용률이 최대 2,000%까지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물론, 모든 음식이 그렇듯 과다 섭취는 피해야 한다. 피페린은 위장 점막을 자극할 수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성인의 하루 권장 섭취량인 1~2그램, 즉 약 반 티스푼 내외를 지키는 것이 좋다.

후추 종류별 특징과 활용 비교

후추 열매
도마 위에 놓인 후추 열매 / 푸드레시피

우리가 흔히 접하는 후추는 가공 방식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가장 대중적인 검은 후추는 덜 익은 초록색 열매를 따서 끓는 물에 데친 후 햇볕에 말려 만든다. 이 발효와 건조 과정에서 껍질이 검고 쭈글쭈글해지며, 강렬하고 복합적인 특유의 향미가 생긴다.

스테이크나 각종 볶음 요리처럼 풍미가 강한 음식에 잘 어울린다. 반면 흰 후추는 열매가 붉게 완전히 익었을 때 수확하여 물에 불린 뒤 껍질을 벗겨내고 속씨만 말린 것이다. 껍질이 없어 검은 후추보다 매운맛은 덜하지만, 부드럽고 섬세한 풍미를 지녀 크림소스, 수프, 흰살생선 요리 등 재료 본연의 맛과 색을 해치지 않아야 할 때 주로 사용된다.

녹색 후추는 덜 익은 열매를 신선한 상태 그대로 동결 건조하거나 소금물에 절인 것으로, 풋풋하고 상쾌한 맛이 특징이며 육류 요리의 소스나 샐러드에 특별한 악센트를 더한다.

금값보다 비쌌던 검은 황금의 역사

흰 후추
그릇에 담긴 흰 후추 / 푸드레시피

오늘날 가장 일상적인 조미료인 후추는 한때 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후추의 역사는 기원전 2000년경 인도 남서부 케랄라 해안에서 시작되어, 고대 인도의 전통 의학 서적인 ‘아유르베다’에 약재로 기록될 만큼 일찍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신비로운 향신료는 아랍 상인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특히 고대 로마에서 사치품의 절정을 이루었다. 로마의 학자 대 플리니우스는 후추가 은과 같은 무게로 거래된다고 기록했으며, 5세기경 로마가 포위되었을 때는 도시를 파괴하지 않는 대가로 금, 은과 함께 후추 1.36톤이 요구되기도 했다.

로마 멸망 후 아랍과 베네치아 상인들이 유통망을 독점하자 후추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중세 영국에서는 후추 1파운드로 소 한 마리를 살 수 있었고, 세금이나 임대료를 후추로 낼 정도였다.

결국 이 독점을 깨고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찾으려는 유럽의 열망이 바스코 다 가마와 콜럼버스의 항해를 이끌며 대항해시대의 막을 열었다.

후추
접시에 담긴 간 후추 / 푸드레시피

한때 인류의 역사를 움직였던 ‘검은 황금’ 후추는 이제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일상의 조미료가 되었다. 요리의 마지막에 통후추를 직접 갈아 뿌리는 작은 습관만으로도 음식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

후추는 몸에 쌓이지 않는 안전한 향신료이며,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오늘 저녁, 요리에 후추를 더하며 한때 제국의 부와 탐험가의 용기를 상징했던 이 작은 알갱이에 담긴 깊은 역사와 과학을 음미해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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