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사라졌던 맥주 ‘핵심 원료’…강원도 야산서 되살아나 ‘연 3톤’ 생산한다

by 김혜은 기자

댓글 0개

입력

연충흠 농부가 되살린 토종 홉
홍천 9개 농가, 연 3톤 생산

홉
홉 / 게티이미지뱅크

홉(Hops)은 맥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원료다. 맥주 특유의 쌉싸름한 쓴맛과 매력적인 향을 부여하며, 천연 방부제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 필수적인 원료는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 사실상 멸종 상태였으나, 한 농부의 집념으로 토종 홉이 복원되어 다시금 국내 수제 맥주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1980년대 수입 개방과 멸종의 역사

홉
홉 / 게티이미지뱅크

과거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강원도 홍천 지역은 국내 홉 생산의 중심지였다. 당시 연간 생산량은 50톤에 달할 정도로 활발한 재배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국내 맥주 수요를 감당하는 주요 공급원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정부가 추진한 농수산물 대외개방정책과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상 등으로 대표되는 경제 개방 기조에 따라 상황이 급변했다.

값싼 미국, 독일산 수입 홉이 국내 시장을 빠르게 장악하면서, 가격 경쟁력에서 밀린 국내 홉 농가들은 재배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보호주의 정책 완화로 국내 재배 기반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결국 토종 홉은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 여겨졌다.

야산에서 시작된 토종 홉 복원

홉
홉 / 게티이미지뱅크

이 사라진 역사를 되살린 것은 홍천의 농부 연충흠 씨다. 그는 야산에서 우연히 토종 홉의 뿌리를 발견했고, 이것이 멸종된 줄 알았던 토종 홉 복원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개인의 발견은 지역 사회의 공동 프로젝트로 확장되었다. 홍천군은 2018년부터 강원대학교 연구진과 협력하여 발견된 홉의 조직 배양 및 대량 생산을 위한 공동 개발에 착수했다.

수년간의 연구 끝에 2021년, 이 토종 홉(품종명 ‘홍하’)은 공식적으로 특허 출원(품종보호권 획득)에 성공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현재 홍천 지역에서는 연충흠 씨를 포함한 총 9개의 농가가 이 토종 홉 재배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 농가에서 생산되는 국산 홉의 총량은 연간 약 3톤에 이른다. 이는 과거 50톤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토종 종자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맥주의 핵심 ‘루플린’의 과학

맥주
맥주 / 게티이미지뱅크

홉이 맥주에 필수적인 이유는 꽃 안쪽에 맺히는 ‘루플린(Lupulin)’이라는 노란색 가루 성분 때문이다. 이 루플린 안에는 맥주의 쓴맛을 내는 알파산(Alpha Acids)과 향을 결정짓는 에센셜 오일이 농축되어 있다.

맥주를 끓이는 과정(자비)에서 홉을 투입하면, 알파산이 이성질화되어 쓴맛을 내고, 에센셜 오일은 다양한 아로마(과일 향, 꽃 향 등)를 부여한다.

또한 루플린은 강력한 항균성을 지녀 효모 외의 잡균 증식을 억제하는 천연 방부제 역할도 수행한다. 연충흠 씨는 이 루플린을 “손끝에 닿는 순간 쌉쌀하고 향긋한 냄새가 퍼지며 맥주의 첫맛이 느껴진다”고 표현했다.

수제 맥주 시장의 로컬 상생 모델

맥주
맥주 / 게티이미지뱅크

복원된 토종 홉은 국내 수제 맥주 산업의 성장에 발맞춰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국내 브루어리(양조장)들은 수입 홉에만 의존하던 것에서 벗어나, 한국의 기후와 토양, 즉 ‘떼루아(Terroir)’가 담긴 독특한 향과 풍미의 로컬 맥주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농가에게는 고부가가치 신소득 작물이 되며, 소비자에게는 차별화된 맛의 경험을 제공하는 상생 모델이 되고 있다. 실제 방송에서는 수확한 홉을 맥아와 함께 끓여 당화 과정을 거친 뒤, 효모를 넣어 발효시키는 수제 맥주 제조 과정이 소개되기도 했다.

국산 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재배 지역도 확산되는 추세다. 홍천 외에도 경북 의성, 전북 부안, 경북 포항 등지에서도 홉 재배가 시도되며 제2의 부흥을 예고하고 있다.

사라진 줄 알았던 토종 홉의 부활은 한 농부의 집념과 지역 사회의 노력이 빚어낸 값진 결과다. 이는 단순한 농작물 복원을 넘어, 한국 수제 맥주 시장의 다양성과 독창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첫걸음이다. 앞으로 토종 홉이 홍천을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한국 맥주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전체 댓글 0